2006년 03월 27일 : 대상의 본질은 어떻게 재현되어야 마땅한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from 멈칫, Previous Blog/2006,blogin.com 2009. 9. 20. 22:2600207398 [일기] 대상의 본질은 어떻게 재현되어야 마땅한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 글쓴이 : Jay Kay
◎ 글쓴날 : 2006년 03월 27일 [월] 10:11:49
실재와 추상 모두를 대상으로 한 리히터의 관찰은 대상과 작가 사이에 중간자 혹은 중개자의 역할을 하는 매개체가 늘 존재하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그의 일련의 추상화(제목이 ‘추상화Abstract picture’인 작품)들은 통상 두 층을 지니고 있다. 덧칠된 겉의 층 아래에 깔린 채 일부만 드러낸 아래층의 모습이 관찰했던 대상-실재하는 것이든 추상적인 관념이든-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혹은 덧칠된 겉의 층 그 자체, 중간자의 추상적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상적인 기법인 사진을 그리는 방법 역시 사진이라는 중간자를 거친 관찰인 것은 아닐까도 싶다. 실재를 사진이라는 광학기계를 통해 한 번 거쳐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대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사진 속의 대상을 사진을 통해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나저나 참 흐릿하게도 말이다. 대사의 본질을 세밀함이 아닌 흐릿함에서 발견했던 것인가? 그의 전시회의 그림들을 본 이 기회는 대상의 본질을 어떻게 재현하는가가 예술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하며 단지 회화뿐만이 아닌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해보는 계기였다. ◎ 글쓴이 : Jay Kay
◎ 글쓴날 : 2006년 03월 27일 [월] 10:11:49
“대상을 관찰한 바를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라는 명제가 예술에 대한 참명제로 인정된다면, 사물에 대한 관찰과 통찰을 평면에 표현한 것이 회화예술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므로 대상의 관찰을 진술하는 방법으로서 그리기를 택한 사람들을 미술가라고 부르는 것에는 큰 이의가 없으리라 단정해본다. 관찰의 대상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혹은 풍경이든 간에 그 대상 자체와 가장 흡사한 형태로 재현하려던 시도가 현대 서양 회화의 출발이라면 관찰 대상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회화 표현의 방법일 것이다. 게다가 서양회화는 실재(實在)만이 아닌 추상적 관념으로도 관찰의 영역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 관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낳는다. 표현은 둘째치고라도 진지한 관찰을 거듭한다고 해서 정확한 실재를 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빛의 반사에 의한 상(像)일뿐인데 말이다. 혹시 실재라고 판단할 만한 상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상의 본질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외형이 과연 대상의 본질일 수 있는 것인가? 이 의문들은 주관적인 대상의 재현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 답은 객관적인 재현-이상적이나 이상이기에 실현 불가능한-은 단념하고 주관이 담긴 관찰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수용자들은 자신의 주관적 관찰과 비교를 하면서 작가의 창의적인 설득에 동의하여 감동을 받거나 혹은 동의하지 못해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 대한 이 생각은 지금 리히터의 를 앞에 두고서 떠올려 본 것이다. 커다란 두 개의 캔버스를 합쳐 놓은 거대한 작품 앞에 앉아서 왼편에 아른거리는 검은 것과 오른 편에 흰 것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회색과 다른 색들의 조화가 어떤 대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던 차였다. 어두움과 밝음의 대비인가, 색 혼합의 결론인 회색에 대한 암시인가. 알기 어려웠다. 작품 앞에서 떠오르는 것은 내 머리 속에 있는, 학습을 통해 알게 된 그 어느 대상과도 짝지을 수 없는 상(像)이었다. 주로 꿈에서 본 ‘무엇’을 떠올리느라 아픈 골치가 또 아파왔다. 고백하건데,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차라리 알 수 없음이 가진 가치를 생각해보려했다. 그것이 바로 길게 적어내려 온 관찰과 재현에 대한 예술가들의 태도였다. 전혀 세밀하지 않은 선-사실 선은 없고 경계는 모호하다-들로 엉킨 작품 , 그리고 마주보고 있는 . 이들이 무엇을 그린 것인가를 열심히 떠들어봤자 ‘그림’이라는 대상에 대한 나의 메타적 관찰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생각했던 대상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작품들이다.
여기서 이와 같은 고민을 리히터도 했을 것이라는 과단한 추측을 던져본다. 대상을 주관 없이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본질에 가깝게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작가이지는 아닐까? 본질을 뚜렷이 파악하는 것은 이상(理想)이기에 불가능한 것이며 우리에게 기억되는 상은 사실 학습되는 것에 불과하다. 꿈속에서 본 ‘무엇’을 표현하는 것은 그저‘꿈에서 본 무어와 비슷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그 무엇’일 따름인 것처럼 본질에 대한 관찰 결과가 흐릿했다면 흐릿한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본질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혹시 리히터도 대상을 명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리히터 1983.5.13)는 체념적 사고” 마냥 흐리게 하는 것이 보다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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