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계속 머릿 속을 맴도는 말이 있다. 이제 내게 졸업은 없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의 졸업식은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망각의 기회를 부여받는 순간이었다.....얼만큼 찌질했던 간에 다 잊을 수 있다. 모른 척 할 수 있다. Reset.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 시작하는 거다. 나의 실수와 사고들은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이제는 완전 다시 시작이다....라고 생각해버렸다. 환경의 변화는 내 고등학교 시절 한 번의 전학으로 그 대단한 효과를 보여줬다. 반에서 중간도 못하던 녀석이 8학군을 벗어나 반의 상위권으로 입성하는 놀라운 변화는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자신감 획득'을 자동적으로 발생시켰으니까.
(나는 내가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만큼 글을 못쓴다. 국문과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부끄럽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졸업했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도,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도...내가 어떤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며 살았는지, 나는 얼마나 존재감을 가진 인물이었던지에 대해서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정말 고등학교 때는 맨 앞에 앉아서 찌질했을 법한 사람이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학교를 짤리는 것 같은 변화. 그런 변화가 가능한 것이 졸업이지 싶다.
하지만,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입학이 아닌 입사를 경험하는 순간, 더 이상 졸업의 쾌감에 대해서는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퇴사? 적어도 내가 일하는 쪽에서는 소문 다 난다. 그래, 퇴사를 해서 인간적인 결함을 숨겨보자. 그래도 내 경력은 이력서에 적히게 된다. 안 적으면 그만이라고?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현실 아닐까?
아무튼. 어른이 안되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이미 무너졌다. 더 이상의 Reset은 없다. 더 이상의 졸업은 없다. 지금 나의 학기는 방학도 없이 자세히 내 이력서에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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