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버지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할머니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는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핍이라면 결핍이지."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가 옆에서 거들었다. "상처면 상처고." 엄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시간 모자라 못 푼 마지막 문제 같어. 20점짜리 주관식 문제." 엄마가 무릎을 쳤다. "하, 그거 미치지, 미쳐." 그러다 엄마가 핏, 웃었다. "그 문제 답만 적어 냈으면 100점 만점 받았을 거고?" 엄마와 아버지는 딱 십 분이 문제였다. 십 분까지는 서로 잘 맞았다. 엄마의 말처럼 마지막 한 문제의 답만 적어 냈더라면 아버지의 삶은 100점 만점이었을까.
- 하성란, <그 여름의 수사修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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